日経エンタテインメント『AKB48 10周年SPECIAL』

닛케이 엔터테인먼트 『AKB48 10주년 스페셜』


요코야마모토 대담 번역

(사진은 맨 아래에, 해석이 필요한 부분은 * 달고 설명)

(의역, 오역 주의)




릴레이 칼럼  멤버가 말하다 AKB48 10년사 ⑦


요코야마 유이 × 야마모토 사야카



AKB48를 이끌어온 마에다 아츠코의 졸업에 동요


결성시부터의 목표였던 도쿄돔 공연이 실현.

한편, 그룹의 얼굴·마에다 아츠코가 졸업하는 등 변혁의 해가 되었던 2012년.

싱글선발의 단골이기도 하고, 인기를 높여가고 있던 AKB48의 요코야마 유이와,

NMB48의 캡틴 야마모토 사야카가 당시를 되돌아본다.




11년말에 『フライングゲット (플라잉 겟)』으로 일본 레코드 대상을 첫 수상한 AKB48.

이듬해 12년도 2월의 25th 싱글 『GIVE ME FIVE』가 6작품 연속으로 밀리언을 돌파해

핑크·레이디의 기록을 33년 반만에 갱신하는 등, 인기가 가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결성시부터 AKB48를 이끌어 오던 마에다 아츠코가 3월에 졸업을 발표.

이런 큰 터닝포인트를 멤버는 어떻게 느끼고 있었을까.

함께 『Everyday、カチューシャ (Everyday,카츄샤)』에서 처음으로 AKB48의 싱글 선발멤버에 들어가고,

점차 지명도를 높이고 있던 AKB48·9기생인 요코야마 유이(09년 가입),

10년의 NMB48 결성당시부터 캡틴을 맡아온 NMB48·1기생 야마모토 사야카(10년 가입)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요코야마

그 연초의 서프라이즈는, 『GIVE ME FIVE』가 멤버에 의한 밴드 연주곡이라고 들었을 때네요.


야마모토

저는 코러스 담당이었지만 목소리를 (다른 사람들과) 맞추기 위해서, 잔뜩 연습했어요.

유이항(요코야마)은 트럼펫이었네.


요코야마

잘 연주하지 못하면 눈에 띄게 되는 악기라서 스튜디오에 2주간정도 다니면서, 리드기타인 다카미나(다카하시 미나미)상들과 연습했어요.

리퀘스트 아워에서 첫 피로를 마치고, 올해도 여러가지 놀라운 일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으니, 3월의 콘서트에서, 마에다상이 졸업을 발표.

멤버도 깜짝 놀라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팬 여러분들의 놀라움이 느껴졌습니다.


야마모토

저에게 있어서도 마에다상은 절대적인 존재였어요.

발표를 듣고, 다카미나상도 울고있으셨고, 솔직히 동요했습니다.


요코야마

충격이였지만, 아직 이타노 토모미 상이나 시노다 마리코 상 (동시에 13년 졸업)들 선배멤버가 계셨으니까,

그 시점에서는, 제 자신은 선배들을 따라가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 아직 이끈다기보다 선배들에게 배운다는 마음을 가졌다는 말)




그 해는 자매그룹이, 더욱 더 기세를 올렸던/늘렸던 1년이기도 했다.

6월의 총선거에서는, 64위까지에 21명의 자매그룹 멤버가 랭크인.

야마모토 사야카는 전년의 28위에서부터 18위에 약진하고, 미야와키 사쿠라가 HKT48에서 처음 랭크 입성을 한다(47위).

또한, SKE48은 공연을 하고 있던 SUNSHINE STUDIO를 수리해 전용극장으로 12월에 오픈하고, 「NHK 홍백가합전」에 첫 단독출장했다.


야마모토

그 해의 총선거는 잊을 수 없어요. NMB48의 멤버가 단숨에 랭크인(야마모토도 포함해 5명)한 것은 기뻤지만,

자신은 AKB48의 싱글 선발에 잔뜩 선발되는 등 찬스가 많은 1년이었는데도,

목표로 했던 선발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정말 분했어요(그 해부터 총선거 선발은 16명까지).


요코야마

그랬었네.


야마모토

전년 HKT48이 결성된다고 듣고, NMB48의 칼라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는데 후배그룹이… 하는 초조함도 있었네요.

AKB48의 선발로써 활동하는 때는, NMB48에 있을 수 없어.

하지만, 받은 찬스는 확실하게 형태로 하지 않으면 안되, 하고 갈등하고 있었어요.


요코야마

이 무렵은 아직, AKB48의 선발멤버 사이에 있으면, 사야네(야마모토)는 낯가림을 했었네(웃음).


야마모토

일단 긴장해서 있었어요(웃음). 그런 가운데, 같은 칸사이출신의 유이항이 말을 걸어주어서, 안심했어요.



도쿄돔의 중요성을 실감



8월에는 AKB448이 결성 이래의 목표로 해 왔던 도쿄돔에서의 콘서트를 처음 개최.

이 콘서트에서 요코야마 유이의 NMB48 겸임이 발표되어, 야마모토 사야카와 팀 동료로서 활동하는 것이 되었다.

또한, 다카하시 미나미의 총감독 취임도 발표되었다.


요코야마

도쿄돔에서의 콘서트는 물론 기뻤지만, 선배분들에게 있어서 이 콘서트에 건 열정이나 곧은 마음은,

저희들 세대와 달랐다고 느꼈어요 (저희들 세대와는 다르게 정말 크다고 느꼈어요).

선배들께서, 저희들 후배를 데리고 가 주셨다고 말할 수 있는 느낌이네요.


야마모토

도쿄돔에서의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에, 다카미나상이 「자신/우리들은 여기를 목표로 해 왔다」는 이야기를 하셔서,

저희들도 이 중요성을 인식하고 도쿄돔에 설 수 있었어요.


요코야마

NMB48 겸임 발표는, 깜짝 놀란 다음엔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발표 다음날에 NMB48의 멤버가 몇 명이나 대기실에 놀러와줘서, 「같이 사진 찍어요」하고 말해주었어요.

와글와글 떠들다 보니 안심되었고, 무엇보다 사야네가 있으니까 괜찮을거야, 했어요.


야마모토

저도 전혀, 놀라지 않았어요. 역시 칸사이 출신의 유이항이네 하고.

아니나 다를까, NMB48 멤버들과 예사롭지 않은 스피드로 (친해져서) 스스럼없이 있었네요.


요코야마

확실히 (그렇네). 잊을 수 없는 것은, 처음 NMB48 극장에 출연해서, 인사를 했을 때. 성원이 없어서, 이건 완전히 어웨이구나(반겨주지 않는구나) 하고.

분해서, 겸임이 끝날때는 「좀더 있어주었으면 했어」하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NMB48로서의 극장공연을 끝까지 해보자 하고 결의했어요.


야마모토

평소에는 프렌들리하게 말하면서, 무대에 섰을 때는 기백이 대단했어요

 레슨은 멤버끼리 가볍게 안무를 맞춰보고 나서 곡을 접하지만, 혼자서 완벽하게 연습을 해 와서,

곧바로 「곡에 들어가주세요(*)」 해서, NMB48의 멤버 모두 깜짝 놀랐어요.

(* 보통 다큐같은걸 보면 먼저 안무만 구호에 맞춰서 연습한 다음에 익숙해지면 곡을 틀어놓고 맞추는데

유이가 말한 건 바로 곡을 틀고 하는 연습에 들어가겠다고 한 것)


요코야마

겸임 기간은 짧았지만 (13년 4월에 겸임해제발표), 진했던(열정적이었던) 시간을 보내면서, 깨닫게 된 것은 많았네요.

음악방송에서 카메라에 찍히는 순간의 집중력이, NMB48의 멤버는 엄청나게 다르구나 하고(대단하다고) 생각했어(웃음).


야마모토

확실하게 키메가오를 하네. (* 키메가오: 자신이 가장 자신있고 예뻐보이는 표정)


요코야마

마츙(오가사와라 마유,14년에 AKB48에 이적)들의 파워풀함에 압도되어서,

좀 더 해도 되는구나,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하는 걸 깨달아서 껍질을 몇 개나 깨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모르고 있다가 멤버들을 보고 알게 되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말)


야마모토

지금 생각해보면 서로 자극되어서 충실했던 매일매일이었어요.

유이항은 「NMB48의 멤버로서 함께 홍백가합전의 무대에 서고싶어」하고 말해주었지만, 실현할 수 없던 것이 지금도 아쉬워요.(*)

(* NMB48가 단독으로 홍백 출장이 결정되기 전에 유이 겸임이 끝나서 함께 나갈 수 없었음)




요코야마 유이

1992년 12월 8일 출생. 교토부 출신.

AKB48 팀 A 캡틴으로 활약중.

14년 12월, 다카하시 미나미가 「차기 총감독」에 지명.


야마모토 사야카

1993년 7월 14일 출생. 오사카부 출신.

10년에 NMB48에 1기생으로 가입. 11년, 캡틴에 취임.

14년부터 AKB48 팀 K겸임








이걸로 닛케이 엔타메 유이 나온 부분 번역은 끝!